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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음기

역시 술은 노동후에 마셔야 맛있다. (feat.편의점 캔와인 파울라너 둔켈, 셀프 이사)

by 하게하게 2021. 6. 24.

냥하.

시험을 한참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기간에 이사를 했다. 굳이.

옆집 고냥이는 2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다가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해줬다. 앞으로 더욱 잘 살길 바란다고 로또 1등도 당첨될 것이고 가는 길마다 꽃밭이 될거라고 말해주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싶다. 로또 당첨되고 싶다.

 

우리의 이사 계획은 세 가지였다.

1. 이문동 집이 철거(재개발 구역임)될 때까지 산다.
2. 남양주 집으로 빨리 들어가서 터를 잡는다.
3. 남양주 가면 평생 서울시티로 못 돌아올테니 살아보고 싶은 곳에 살아보자.

나는 1번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나, 집 계약자가 거부하는 관계로 3번을 결정하게 되었다.

3번을 결정하고 나서 알아본 다음 거주지는 정릉. 이유는 집 계약자의 직장과 걸어서 10분 거리여서… 그의 로망이 직장 걸어서 출퇴근 하기라나 뭐라나. 마음에 쏙 드는 이유는 아니지만 그간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생고생을 했기에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런 반박과 구박을 하지 않고 순응.

나는 푸릇하고 풀내음나는 정릉이 맘에 들었다.

재개발 지역에 속한 이문동은 골목 하나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곳이었다. 건물은 하나씩 하나씩 철거되었다. 우리가 그 곳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삭막함이 날마다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앞집에 사는 영희엄마는 청약에 당첨되어 갑자기 12억 돈방석에 앉기도 했는데, 그 영희 엄마가 우리와 가까운 지인이라 배가 많이 아프기도 했었다. (그들은 제주도에 집을 짓고 여유로운 삶을 시작한다고 한다.)

아무튼. 나날이 늘어가는 고층 아파트와 나날이 적어지는 일조량에 지쳐 이문동을 떠났다. 아주 오래된 주택이지만 내부는 깨끗하게 수리되어 있어 살기는 편했다. 하지만 해가 잘 들어오지 않아 많이 우울하고 칙칙했다. 사람 살아가는데 있어 일조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집 강아지까지 알게 되었으니 엄청난 교훈을 준 집이다.

우리는 이사준비를 직접 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머리채를 두 번 돌려 감아 잡고 말릴건데… 나는 우리집 짐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크나큰 착각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물건들은 설탕이 솜사탕으로 변하듯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고... 심지어 이사 첫날 사둔 새 물건들을 보고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그간 물건에 잡혀 살았다는 생각이 나를 압도했다.

열심히 번 돈으로 산 물건들을 열심히 번 돈으로 산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 쓰레기 봉투가 T.O.P 특수 쓰레기 봉투라서 더 그랬나. 비싸더라.

이사로 옥신각신 몇 번이나 싸우고 생고생 후에 정릉 집에 안착. 이문동 집보다 몇 배는 작아서 집을 줄이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만족한다. 짐은 짐일 뿐이다.

정릉 집에는 둘이 사용하기 충분한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 있는 집에는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두려운 것이 있다면 매일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은 나의 미래.

사실 지금도 술 한잔 마시고 있다. 달빛을 바라보며 마시는 술은 더 달다 달아.

이사 와서 급하게 설치한 가림막. 앞집에서 우리집을 보는 것도 싫지만 내가 앞집을 보게 되는 것도 너무 싫다. 보려고 본건 아닌데 왜인지 잘못한 느낌이 느므 시러.

집 계약자와 16시간에 걸친 이사 끝에 먹는 두번째 끼니. 초밥과 맥주를 마셨다. 이문동에 사나 정릉에 사나 온 세계 맥주는 다 마실 수 있다. 이사 기념으로 세계맥주 여덟캔이나 사왔다.

집 앞에 작은 헐떡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넘는것이 곤욕이라 눈에 보이는대로 술을 쟁여놓을 것 같다.

나의 선택은 파울라너 둔켈. 나는 둔켈을 좋아한다. 이사를 빡세게 해서 벌컥벌컥 마시기 좋은 라거를 마실 수도 있었지만, 굳이 이 놈을 마셨다.

은은하게 단맛도 느껴지고 밍밍한 스타우트의 풍미도 스쳐 지나간다. 이사로 지친 나에게 위로를 준다.

앞으로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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